이 늦은 밤, 조용한 사무실에 혼자 남아, 커피를 내릴 때. 지금이 내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커피콩 가는 소리가 사각사각 손으로 전해온다. 아내가 사준 독일산 수동 그라인더. 첫 사랑 김혜수가 병원에 찾아왔을 때, 낭만닥터 김사부 한석규가 꺼내 쓴 그런 제품이다.
내 아내는 커피콩을 직접 볶는다. 그런 날엔 커피 향이 온 집안 가득해서 참 좋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커피콩을 갈고 있다. 큰 딸이 아빠 고생한다고 주문해준, 블루 바틀이 아까 낮에 도착했다. 이렇게 가끔은 다른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갈색 커피 가루를 드리퍼에 담는다. 나는 이 하얀색 도자기가 좋다. 그래서 아내에게도 똑같은 것을 선물했다. 나 혼자만 좋은 것을 갖고 있는 것은 미안하니까. 이제 물이 끓었다. 긴 포트 주둥이를 타고 나온 뜨거운 물에 커피 가루가 금세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커피 떨어지는 소리와 신선한 향이 내 온 방을 채우고도 남는다. 그 안에서 유리 서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이 시간이 가장 길게 느껴진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의식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제 컵을 고를 차례다. 잔 안쪽의 하얀색이 커피의 갈색으로 차오른다. 그 안으로 함께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여행을 가면 꼭 컵을 사오는 것이 내 취미다. 언젠가 세상의 어느 여행지에서 안쪽이 진짜 눈부시게 하얀 잔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내 꿈이다.
뭔가를 집중해서 생각해야 할 때, 나는 이렇게 커피를 내린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커피를 다 마실 때가 되면 그 생각들이 정리된다. 고백을 하자면, 나는 참 고독하다. 옛날에 큰 회계법인에 있을 때는 물어볼 사람도 많았고, 내가 틀려도 고쳐줄 윗사람이 있었다. LA나 시카고에 있는 다른 선배 회계사들과 상의도 하지만, 결국 최종적인 결정은 나의 몫이다. 나만 바라보고 있을 손님을 생각하면, 그 책임감은 참 무겁다. 그래서 이렇게 커피를 내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내게 중요한 업무의 한 과정이 되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다리를 책상위에 올리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커피의 첫 모금을 입술에 댄다. 첫 사랑만큼이나 떨린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다. 오늘 내 옆에 있는 가수는 알리. 며칠 전, 뉴저지 <복면가왕 콘서트>에서 '그대는 어디에'를 부르는 그녀를 처음 봤다. 나이가 들수록 노래하는 여자가 예쁘다.
그나저나 법인세(S Corp) 세금보고 마감(3월 15일)이 코앞인데, 그런 곳에 찾아가는 한량 회계사는 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삶의 모든 순간들이 참 즐겁고 행복하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더 즐겁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 혼자만 행복하면 미안하니까.
<
문주한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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