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리안퍼레이드 그랜드마샬 박형만 이사장
▶ 서독광부 출신으로 67년 이민·아메리칸 드림 성취 본보기… 비영리 ‘만희코주재단’ 통해 숨은 사회봉사 활동 앞장 “3년만의 코리안 퍼레이드 한인사회 도약의 전기 되길”
![[특별 인터뷰] 성공한 사업가·사회봉사가로서 존경받는 리더 [특별 인터뷰] 성공한 사업가·사회봉사가로서 존경받는 리더](http://image.koreatimes.com/article/2022/09/05/20220905235352631.jpg)
박형만 만희코주 재단 이사장이 오는 24일 올림픽가에서 화려하게 펼쳐질 본보 코리아 퍼레이드의 공동 그랜드 마샬로 선정된 소감을 밝히고 있다. [박상혁 기자]
제49회 ‘코리안 퍼레이드’를 이끌 그랜드 마샬로 선정된 만희코주재단의 박형만 이사장(85·남가주 한국학원이사장)은 현재도 사회봉사가로서, 사업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1세대 올드타이머다. 박 이사장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로지 잘 살기 위해 서독 광부를 자원하고 3년만에 다시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은 아파트 500여 유닛을 소유한 억대의 재산가다. 또한 지난 20여년동안 자신의 아호를 딴 만희복지재단을 설립해 고향인 공주지역 어린이들에게 수백만달러를 기부한 숨은 사회봉사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최근에는 폐교직전에 놓였던 뿌리교육의 산실 남가주한국학원 이사장을 맡아 천신만고 끝에 정상으로 돌려놓는 리더십을 발휘해 한인사회 리더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 편의 인생 드라마
그는 1937년 충남 공주 빈농의 10남매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때부터 숫자에 밝아 군에서도 중앙경리단에 차출돼 하사로 제대한 박 이사장은 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으나 형의 권유로 1964년 27살의 나이로 서독 광부로 갔다.
광부의 생활은 그에게 시련과 도전을 동시에 던져 주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외국에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알게됐다. 독일의 4개 광산 중 하나인 루크(Ruhr) 공업지대의 에쎈(Essen)으로 가서 3년간 휴가도 없이 하루에 4시간만 자면서 일을 했다.
독일에 간호사로 왔던 아내를 만나서 약혼 후 1967년 미국으로 건너와 다음 해 결혼을 했다.
박 이사장은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은 독일 광부로 파견된 가장 큰 수익이었다”고 웃으며 회고했다.
미국의 이민생활도 누구나 힘들었지만 박 이사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접시닦이, 정원사, 구두수선, 종이컵 만드는 공장일 등 시간당 1달러45센트를 받으며 안 해 본 일없이 닥치는 대로 다했다. 그리고 양복도 한 벌 사면 최소 10년 이상 입는 것이 보통이고 구두는 밑창까지 교체하고 닳을 때까지 신다가 아내가 결국 버려야 새 신발을 신었다.
아내와 함께 열심히 번 돈으로 주유소, 바디샵을 차리게 됐고 땅과 아파트를 사들이며 오늘날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업가가 됐다. 현재 한인타운 중심으로 500여 유닛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박 이사장은 지금도 망치를 들고 홈디포를 오가며 직접 수리해주는 정력을 과시하고 있다.
■만희코주재단, 숨은 사회봉사가 활동
지독하게 검소한 생활로 사업을 하면서 한 때 ‘자린고비’ 소리를 들었던 박 이사장은 그동안 수십년동안 숨은 봉사를 해와 지금은 ‘존경받는 돈을 쓸 줄 아는 사업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매년 10월 고향인 공주의 소년소년 가장, 무의탁 노인, 장애인 등에게 장학금과 생활지원금을 기부하고 있다. 지원금만도 백만 달러에 달한다.
8년 전 LA에 비영리재단 ‘만희코주재단’(Manhee KoJu Foundation)을 설립했다. 그의 이름 ‘만’자와 아내 이름에서 ‘희’자를 가져다 ‘만희’를 지었고, 코리안 유대인이라는 뜻으로 ‘코주(Koju)’를 더해 이름 붙였다.
만희복지재단은 현재 주요 사업으로 매년 소년소녀가장, 장애인, 독거노인을 위한 생활보조금 형식의 지원금을 제공하고 있다. 올해 생활지원금 전달식은 지난 6월8일 시니어센터에서 충남 공주 출신 박찬호 선수가 참석한 가운데 장애인,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싱글맘, 저소득가정 등 수혜자 50명에게 1인당 1,000달러씩 총 5만달러를 전달했다. 이 봉사는 수년째 계속되고 있다.
박 이사장은 “향후 록펠러 재단과 같이 지역사회에 일조하는 비영리 기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죽을 때 까지 기부하다 갈 것이다.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 강조했다. 그는 자신이 절약해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도 엄격하게 검소하다.
박 이사장의 활동 중 남가주학원도 빼놓을 수 없다.
남가주 한국학원은 산하 윌셔 사립 초등학교가 운영난으로 전격 폐교된 후 학교 건물 활용방안을 둘러싸고 한인사회와 갈등을 겪으면서 지난 2019년 1월에 한국정부로부터 분규 단체로 지정돼 지원금이 끊기는 등 어려움을 겪게됐다. 그러나 박 이사장의 리더십으로 분규단체에서 해제되고 이사회도 정상화됐다.
■코리안 퍼레이드 그랜드 마샬 영광
박 이사장은 “해외한인 후세들의 뿌리교육의 산실이 남가주한국학원이 정상화된 것에 뿌듯한 보람을 느낀다”며 “한인 후세들의 정체성 교육이 자리잡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LA 한인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코리안 퍼레이드를 이끄는 그랜드 마샬은 나에게 더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으며 그랜드 마샬을 맡게 돼 영광이고 감개무량하다”면서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한인사회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3년만에 화려하게 돌아오는 코리안 퍼레이드를 계기로 한인사회도 새로운 도약과 전진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형만 이사장 약력
1937년 충남 공주 출생
1964년 독일 광부로 루르엔센 광산 근무
1976년 남가주 서독동우회장
1978년 충남 공주향우회 회장
1981년 코리타운번영회 이사장
1988년 남가주한국학원 이사장
1997년 한국 충남 공주 만희복지재단 설립
1998년 남가주한국학원 이사장
1999년 남가주한인재단 이사장
1999년 한인아파트소유주협회 이사장
2007년 한미동포재단 이사장
2011년 미주한국문화유산재단 이사장
2013년 타운 노인 및 커뮤니티센터 이사장
2014년 LA에서 만희코주재단 설립
2019년 남가주한국학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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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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