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크게 소리 내어 웃지를 않는다. 왜 그럴까?
나름대로 제각각 마음에 못을 박고 조심스럽게 살아가기 때문일까? 결혼한 여인은 친할머니나 외할머니가 된다. 그러다 자식에게 무슨일이 있으면 남겨진 손주들은 대개는 할아버지도 있지만 할머니가 맡게된다.
역적이 되면 그 죄를 물어 삼족을 멸하는 건 옛날 이야기인 줄 알았다.
외갓집은 김포였고 종가집이었다. 서울을 벗어나면 한강 갯벌이 나타나고 군인이 지키는 검문소부터 경기도 김포였다. 북한이 날려보낸 삐라나 수상한 놈은 신고하라는 현수막이 펄렁거리는 곳이다. 친정엄마에게는 오빠와 여동생이 있었다. 전설속에 전해진 대단한 외아들 외삼촌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연세대를 나와 이대 나온 부인과 아들 딸을 낳고 잘 살고 있었다. 6.25 전쟁 때 삼팔선이 가까운 김포는 북한과 남한의 격전지였다. 중립적인 외할아버지는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지만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외삼촌 부부를 부르조아 지주라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개 총살을 시키는 걸 눈 앞에서 겪었다. 그러함에도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 당시 지식인들에게 유행이었던 공산주의에 물들었다하여 그 피해는 자식들에게도 이어졌다. 신촌으로 옮겨와 남겨진 가족들과 손자와 손녀는 엄하지만 조심조심 애지중지 키우셨다. 외가에서는 텔레비젼이나 라디오에서 총소리만 들려도 채널을 돌렸고 그런날은 식사도 못하셨다. 밤에는 두분이 같은 이부자리에서 의지해야 잠들 수 있어서, 제사날에도 넓은 안방은 두분만 주무셨고 새벽이면 할아버지의 잔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종가집 손자는 대학 때 결혼해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건강하게 나아서 외가에도 흐믓한 온기가 돌았다.
그러나 손자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어도 신원조회에서 탈락했고 유학도 갈 수 가 없었다. 남산에서 반공교육수첩에 도장을 받아야 외국엘 나갈 수 있고 그러한 연좌제라는 것이 1980년대까지 있었다. 그 뒤에는 여행 자유화가 되었지만 외가식구들은 왠지 외국엘 별로 나가지를 않았다. 그래선지 나는 요즘같이 잔인하게 자극적으로 죽이고 싸우는 내용은 글로만 읽고 얼떨결에라도 보게되면 밤새 뒤척이고 우울해진다.
친할아버지는 키가 크고, 잘 생기고, 멋쟁이로 홍콩 양복, 라이방 선글라스, 빽구두를 신고 술과 여자를 좋아한 팔난봉꾼인데 그나마 다행으로 도박과 춤, 노래엔 소질이 없으셨다. 그래선지 나는 아무리 연습해도 화투나 카드 짝을 맞출 줄 모르고 노래방에 가서도 재미가 없다며 졸고 있다. 내 남동생은 4대 독자였고 그나마 할머니와 엄마는 남매를 낳아서 다행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던 건설소장이던 할아버지는 가는 곳마다 현지처가 있었다. 가장 여우 같았던 재일교포 출신인 작은 할머니에게서 삼촌과 고모가 5명이나 있었지만 할아버지껜 아버지와 손자가 가장 우선 순위였다. 조강지처인 할머니는 아버지와 고모를 홀로 키우셨고, 얄궂게도 16살에 결혼해서 10년동안 아기가 없던 엄마를 눈 한번 흘기지 않으시고 없어도 괜찮다고 하셨다. 나를 낳고 남동생을 낳은 뒤엔 흐믓하게 소리내어 웃으셨다만, 내가 유치원 때 울 엄마는 청상과부가 되었고, 그뒤로는 돌아가실 때까지 큰소리로 울거나 웃지를 않으셨다.
어느날 뾰족 구두, 빨간 입술에 양산을 쓴 젊은여자가 쪽 지은 할머니를 형님이라 부르며, 할아버지가 몇달 째 집에 들어오지않고 생활비를 안준다길래, 싸가지 없는 나는 할머니한테 첩년을 간통죄로 콩밥을 먹이라고 아는 척을 했다. 할머니는 처음 만났는데도 욕도 안하고 애들 상처받지않게 잘 키우라며 덤덤히 말한다. 좋은 시절은 지나고, 늙고, 재산도 거덜나더니, 종로에서 일본 단체 관광 가이드 깃발을 든 작은 할머니를 보았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호적에 동거인에서 부인으로 이름이 올라왔다. 가족 묘지에 한 항아리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모신 뒤에는 만난적 없는 고모와 삼촌들은 무탈하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나는 상냥하고 크게 웃지는 않지만 웃는 얼굴이다. 언젠가부터 대략 할머니가 된 후로는 입꼬리가 밑으로 쳐지고 웃지를 않는다. 몇년 전부터 마이크나 방송으로 들리는 소리는 귀가 아프고 또렷하지 않다. 모두가 깔깔 웃은 뒤에 그제서야 한박자 늦게 히히 웃는다. 병원에선 바깥 일을 하려면 보청기가 필요하지만 생활엔 지장을 없다하여 그럭저럭 지내지만, 소근대는 귓속말로 내 흉을 봐도 나는 모르고 실없이 웃을때가 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늦가을 빛깔 고운 단풍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웃는 할머니는 멋지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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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희 전 한국학교 교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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