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얘기는 반세기전에 일어난 일이며 나의 생애에서 가장 무섭고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다. 결혼할 당시 남편은 6개월만 지나면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할 참이었다. 우리는 결혼하자마자 군부대 근처의 조그만 두방이 딸린 셋집에 살게 되었고 지금도 정겨운 추억이 담긴 그 골목길은 고즈늑한 돌담길로 이어져 있었다. 그날도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일상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꼭두새벽 1시에 그 고요하고 적막한 골목길에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뛰어오는 사람들의 구둣발 소리는 천지를 진동시키는 것 같은 소음이었고 이상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 죽으라고 뛰어 가던 어떤 사람들의 발길이 그만 우리가 세들어 살고 있는 대문 앞에서 딱 멈추고 대문을 사정없이 발로 차고 주먹으로 탕탕 두르리면서 이윽고 그들이 “조 대위, 조 대위” 하면서 마구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남편이 발딱 일어나 몇초만에 군모, 군복, 군화를 신고는 대문으로 막 뛰어 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두런두런 사람들의 얘기 소리가 들리고 드디어 세 남정네가 아니 세 군인들이 죽을힘을 다해 죽기 살기로 뛰어 가는데 그 골목안은 마치 천둥번개 치는 소리인지 지진이 난 것처럼 우당탕탕 무서운 소리가 나면서 멀어져 갔다.
아마도 그골목길 안의 주민들은 다 잠에서 깨어 났으리라. 얼마후 온 세상은 너무도 조용하고 무서운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일로 이 꼭두새벽에 사람을 납치하다시피 데리고 가는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아 ! 그렇구나 얼마전에 청와대 뒷산에 공비들이 나타났다 하더니 전쟁이 일어났나보다. 전쟁이라는 단어에 나는 그만 무서움에 이가 덜덜 떨리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벌벌 떨고 있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두부장수 할아버지의 종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깜깜한 새벽인데 나는 덧문을 열고 창문을 열어서 저만치서 두부장수 할아버지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을 기다렸다.“따끈한 두부가 왔습니다.” “두부 사세요.” 하는 할아버지의 외침이 들렸다. 할아버지가 창문 가까이 왔을때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면서 창문을 열었다. 이밤중에 사람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과 다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그만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저… 할아버지… 두부… 두모만 주세요.” 따뜻한 두부를 받아들고 멀어져 가는 할아버지를 하염없이 바라 보았다. 또다시 무서운 침묵과 정적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쪽 골목길에서 제첩국 아주머니가 “제첩국 사이소 ” 하면서 그 차갑고 싱그러운 새벽 공기와 함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창문을 열고 “저…. 아주머니 제첩국 한 냄비만 주세요.” 하였다 그러고 보니 두부장수 할아버지나 제첩국 아주머니 모두 전쟁이 일어나서 우왕좌왕 하고 갈팡질팡하는 그러한 모습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새벽 하늘은 옅은 분홍색과 보라색이 어울려 찬란하고 아름다운 여명의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이밤을 꼬박 새우고 또다시 창문을 통해 바라보니 교복을 단정히 입은 남녀의 학생들과 일반 직장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발걸음을 재촉 하였다. 그저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고 전쟁이 난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저녁 퇴근 시간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무정하고 야속한 시간은 늦게만 가고 있었고 얼마를 기다렸을까. 드디어 대문이 화들짝 열리면서 꼭두새벽 1시에 입고 갔던 그 옷 그대로 밤사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당하고 힘차게 걸어오는 남편을 보고 나는 그만 지난밤에 초죽음에 가까운 악몽을 다 잊어 버리고 “야! 대한민국 군인 참 멋지다.” 하고 중얼거렸다. 지친 모습 전혀 안보이고 할일을 다 한 사람처럼 늠름하였다. 지난밤에 군 부대에서는 한 사병이 급성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사망할 수도 있기에 그 부대에 복무하는 군의관들은 전원 복귀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져 그 사병들이 목숨걸고 우리집까지 뛰어 왔던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아 왔던 터라 이십대 중반의 이 사건은 나에게 인생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교훈과 삶에는 돌연 예기치 않은 복병이 숨어 있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그 한밤중에 나를 찾아준 두부장수 할아버지와 제첩국 아주머니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하는 은인들이었다. 그사이 몇달이 지나 남편은 군복무를 다 마치고 영예로운 제대를 하였고 우리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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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자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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