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전, 그러니까 1988년 4월로 기억된다. 최초의 세계바둑대회가 열렸다. 그 대회가 후지쓰배 세계 바둑선수권대회다.
세계의 16강이 초청된 이 사상 첫 세계대회에 참가한 한국기사는 조훈현, 서봉수 그리고 장두진이었다. 한국팀은 그러나 사실에 있어 들러리에 불과했다. 세계 최강의 자리 다툼은 일본과 중국기사간의 한판 승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기 때문.
‘혹시나’했던 기대는 ‘역시나’로 끝났다. 장두진, 서봉수 등이 줄줄이 나가 떨어졌다. 마지막 보루 조훈현도 당시 일본의 최강 고바야시에게 패했다. ‘1회전서 전멸’의 참담한 전과였다.
그 해 여름 또 다른 세계바둑대회가 열렸다. 응창기배 대회다. 한국 기사로는 조훈현만 유일하게 초청됐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여전히 들러리 신세였기 때문이다.
조훈현은 그러나 해냈다. 고바야시, 임해봉 등 절정 고수들을 차레로 격파했다. 그리고 결승에서 13억 중국의 대표 섭위평을 잠재웠다.
이제와서 보면 그 조훈현의 분전이 스타트 라인이었다. 이후 4년마다 열리는 응창기배 우승은 한국 기사들의 독차지가 됐다.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등의 순서로.
그리고 불멸의 기록이 세워진다. 세계 바둑대회 23연패(連覇)의 기록이다. 2000년 이후 한국은 한번도 국제기전 우승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는 이야기다. 세계대회에서 들러리나 섰던 80년대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인 셈이다.
그 기록이 그런데 깨졌다. 그게 지난 봄의 일이다. ‘23 대 0’의 퍼펙트 기록이 ‘23 대 1’로 바뀐 것이다.
한국기사들이 또 다시 우승, 준우승에 3위까지 휩쓸었다. 7일 끝난 16회 후지쓰배 세계대회 바둑대회 결과다. ‘24 대 1’이 됐다. 한류(韓流)는 여전히 초강세라는 신호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최강자 이창호는 3위로 밀리고 결승을 다툰 기사는 갖 스무살의 이세돌과 10대인 송태곤이라는 신예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세계 정상을 넘볼 수준의 신예기사가 한국에는 나란히 서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바둑은 왜 이토록 강한가. 자유로움과 투명성이 그 강점이다. 신예 기사들이 공동으로 연구를 한다. 그리고 자유로운 발상하에 신수를 만들어 낸다.
게다가 조훈현 같은 엄한 조련사가 건재해 있다. 말하자면 새로움과 전통의 절묘한 조화에 그 비밀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둑 뉴스에만 눈이 자꾸 간다. 기본 행마도 모르는 아마추어 정치놀음, 재탕 삼탕도 불사하는 뻔뻔한 부패극 시리즈. 그나마 청량제가 바둑 소식이기 때문일까.
<옥세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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