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5월7일 오전. LA폭동이 발생한 지 1주일 만이다. 한인타운 버몬트 애비뉴와 올림픽 블러버드 인근에 정장차림에 검은 안경을 낀 건장한 남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대형세단 몇 대가 서행했다. 이들이 오기 전에 주변 곳곳에는 좋은 목을 차지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취재진들의 경쟁이 벌어졌다.
이들 차량이 올림픽 블러버드를 이용해 타운으로 들어올 것을 예상한 취재진들은 뒤통수를 맞았다. 반대편 샛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안전 제일주의’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당초 자리 경쟁에서 밀렸던 사람들에겐 오히려 유리한 상황반전이었다.
차가 멈추고 잠시 후 삼엄한 경계 속에 한 신사가 내렸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었다. 주민들과 취재진들에 손을 흔들었다. 4.29 폭동으로 망연자실해 있는 한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인타운에 들른 것이다.
워싱턴 DC의 대통령이 대륙 서쪽 끝 LA의 한인타운을 찾아온 것은 한인들이 똘똘 뭉쳐 주류사회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 주길 탄원했던 덕이었다. 우리를 따라다니던 ‘모래알’ 이미지를 씻은 것은 폭동의 비극이 낳은 역설이다.
그래도 폭동의 긍정적 부산물을 언감생심 폭동 피해에 견줄 수는 없다. LA폭동은 미 역사상 12번째로 큰 규모의 폭동으로 기록된다. 로드니 킹 사건과 관련된 흑백 갈등이 원인이지만 정작 최대 피해자는 한인이었다. 약탈과 방화 피해를 입은 2,500여개의 상점 가운데 한인 소유가 70%에 달했다. 피해액은 전체 7억달러에서 우리의 피해만 4억달러가 넘었던 것으로 추산됐다.
인종갈등으로 점화된 폭동은 미국 역사 교과서를 두루 장식한다. 1919년 13일간 계속된 시카고 폭동으로 흑인과 백인 58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1935년 할렘 인종 폭동, 1968년 와츠 폭동에 이어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후 29개 주 125개 도시로 확산된 폭동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흑백 갈등에 한인들이 애꿎게 당한 LA폭동은 황당한 사건이었다.
12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 속으로 잦아드는 게 안타까워 기록으로 보전하려는 시도가 간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를 생생히 담은 영상물이 없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아 있던 차에 한인 변호사가 1년 넘게 폭동 다큐멘터리 DVD 제작에 공을 들여 곧 완성품이 나온다고 한다.
되새김질하고 싶지 않은 과거이고 인종갈등을 촉발해도 안되지만, 그냥 잊혀져 가게끔 내버려둘 수는 없는 역사다. DVD가 나오면 적어도 타운에서만큼은 대박이 터졌으면 한다.
<박봉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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