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山)에 왔다. 빽빽한 자작나무 틈으로 쏟아지는 정오의 햇빛에 첫 눈은 서럽게 녹고 있다. 청자 빛 하늘에 눈이 시리다. 오늘은 더 깊이 입산(入山)했다. 산 깊이 들어가면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다. 겨울임에도 아직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산바람에 번득이는 이파리 하나조차 신비롭게 보인다.
저 아래 산허리를 감싸고 흐르는 강은 온통 은비늘로 가득하다. 때로는 빛의 반사로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 같기도 하다. 강 가운데 물오리들이 돌 위에 앉아 검은 숲을 배경으로 날개를 말리고 있다. 그 앞에 튀어 오르는 물보라는 모든 빛을 푸른색으로 흡수하는 것이어서 하늘과 강 그리고 산의 경계는 따로 구분되지 않았다.
산에 가면 누구나 신비를 배운다. 삶의 신비, 신앙의 신비, 침묵의 신비, 인내의 신비, 기도의 신비, 일체감의 신비 그리고 관찰과 예감의 신비를 배운다. 두 주 전 일출 무렵에 높은 산등성을 올랐다. 비 온 후의 산은 두 다리가 떨릴 만큼 추웠다. 빽빽한 소나무 사이로 빛의 폭포가 쏟아지며 아침 해가 불쑥 불쑥 솟아오르고 있었고, 찬란한 빛의 분산(分散)에 도취되어 추위도 잊고 하얀 윤이 나도록 씻긴 삼부능선 끝으로 올라섰다.
그 순간이다. 갑자기 경계 없이 펼쳐진 푸른 강과 하늘을 만났다. 그 때 어딘지 알 수 없는 먼 숲에서 오래 산 까치 울었다. 내가 서 있는 산은 바다위에 떠있는 작은 배와 같았고 주변의 모든 것은 투명했고 경계는 없었다. 나는 경계 없는 거대한 푸르름의 일체 속으로 발을 내 디딜 수 없었다. 그 자리에 바위처럼 그냥 오래 서 있었다. 그 날은 내가 일체감의 신비를 처음으로 학습한 날이었다.
산에 가면 늘 새로운 만남이 있다. 그 흔한 낙엽도 산에선 새롭다. 아침 산의 낙엽은 그리운 서리꽃으로 다시 피어난다. 설령 하늘에서 비라도 뿌릴 참이면 낙엽은 콩 볶는 소리로 요란하다. 그 때 심호흡하면 빨려오는 산 익는 냄새. 산에선 모든 것이 발효한다. 다시 먼 산허리 바라본다. 은비늘 가득히 춤추는 강이 하얀 갈기를 일으킨다. 곧 뒤돌아 볼 것 같은 그리움의 복받침으로 멈출 듯 멈출 듯 흐르고 있다. 산에선 모든 것이 그리워서 새롭다.
며칠 동안 세찬 바람이 불었다. 바람 부는 산을 보려고 산에 갔다. 우웅-우웅- 계곡을 흔들며 우는 칼바람이 산마루에 쌓인 낙엽을 절벽 아래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겨울의 산에선 지팡이가 필요하다. 얼마 전 사부능선 큰 바위 밑에서 봐 두었던 쓰러진 나무 곁에 갔다. 자세히 보니 생각보다 굵어 한 뺨이 넘었다. 눈어림으로 길이를 재고 줄 톱으로 겨우 끊어 내었다. 넘어 진지 오랜가 보다. 껍질이 검게 일어난 것이 볼쌍 사나웠다.
줄 톱으로 흘어내리니 이내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고통과 슬픔을 이겨낸 사람이 하얀 이를 보이며 웃는 것 같다. 죽은 것의 속살이 저렇게 싱싱하고 빛이 날 수 있을까.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한 참나무 향기가 난다. 높이 들어 보니 든든하고 무거워 마음에 든다. 모세의 지팡이도 이런 것이었겠지 생각하니 든든한 새 친구하나 얻은 기분이다.
하산할 때 작은 폭포를 지난다. 폭포에서 쏟아진 물이 큰 바위에 부딪친다. 그 물이 깨어져 산산 조각이 난다. 그 아픔으로 찬란한 빛이 흐른다. 그 빛이 맑은 강이 되어 흐른다. 그 물로 산을 씻고 들도 씻고 더러워진 사람의 마음도 씻는다. 폭포 아래 둔덕에 거대한 참나무가 진흙을 끌어안고 넘어졌다. 하늘을 향해 무덤처럼 업어져있는 진흙 속에서 파란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저와 꼭 닮은 참나무 새끼 이파리였다. 그 자리에 한참서서 나는 배웠다. 배운 것을 마음으로 복창했다.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이 푸르면 깨어지고 넘어진 것도 아름답다.”
어떤 유명한 작가가 톱스타 최진실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녀에게는 어른이 필요했다. 그녀 곁에 따뜻한 어른이 있었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홀로서기가 힘들어서 누구에게나 어른이 필요하다. 산에 와 보라. 내가 어떤 어른을 붙잡아야 할 지 그걸 배우게 된다. 산에서 신앙을 배웠던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시편 1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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