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소설가올해 응모작은 평이한 수필 형식의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단편소설이라는 장르에 부합하는 형식을 갖추고, 거기에 독창적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은 많지 않았다. 응모하는 분들은 각자의 흥미로운 사연을 풀어놓고 희망과 교훈을 얻는 패턴에서 더 나아가,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해서 보편적 질문을 불러일으키는지 생각해 봤으면 한다. 하지만 소설 한 편을 완성했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를 하나 창조한 것이므로, 응모작 모두에게 그 시도에 값하는 응원도 함께 보내고 싶다.
먼저 신순호 씨의 <아임 낫 길티> 와 홍남표 씨의 <기다린 자국>가 눈에 띄었다. 둘 다 단편소설의 이야기 형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어 반가웠다.
<아임 낫 길티>는 억울하게 교통 범칙금 티켓을 받은 우버 운전자의 재판을 소재로 하고 있다. 차분한 문장과 치밀한 서술이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부조리한 현실 앞에 선 약자의 처지, 타협과 용기 사이의 심리적 갈등도 잘 표현돼 있다. 사건의 디테일과 기승전결의 구성에도 솜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내면의 도덕적 질문이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든다. 다만 이야기 구조가 단순하여 사유의 확장이 아쉬웠다.
홍남표 씨의 <기다린 자국>은 팬더믹 상황이 어떻게 일상의 질서를 파괴하고 인간 관계에 균열을 만드는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일자리를 잃은 주인공의 암울한 현실을 중고마켓을 기웃거리는 허탈한 심정을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한 점, 빌려간 돈을 갚지 않는 형과 형수를 악인이 아니라 그 역시 곤경에 처한 생활인으로 그림으로써 서사의 균형을 지킨 점도 돋보였다. 무너진 관계와 사소한 중고 거래에 연연하는 자신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결말도 무난했다. 불필요한 내면 고백을 줄여서 읽는 사람에게 생각의 여백을 좀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두 작품 모두 각기 다른 장점이 있었지만 여러 소설적 장치를 통해 소재를 형상화한 <기다린 자국>을 당선작으로, <아임 낫 길티>를 가작으로 결정했다.
또 한 편의 가작은 박하영 씨의 <신분상승>이다. 노양심이라는 속되고 뻔뻔한 인물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착취와 패악을 일삼는 음식점 인수 과정이라든가 신분상승을 위해 목사가 된 경위, 주변인물들과의 마찰 등이 흥미롭게 포착되어 있다. 음식점을 인수하려는 사람의 아내를 화자로 설정한 것도 이야기 서술의 거리를 유지하는 적절한 설정으로 보인다. 이야기의 뒷부분에 갑자기 속도가 붙으면서 급하게 마무리한 느낌을 주는데, 전체적으로 구성력을 갖추면 더 좋은 작품이 되리라 생각한다.
글은 말과 다르다. 말은 이야기에 그치지만 글에는 그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려는 사유가 담기게 마련이다. 소설 심사를 하다보면, 글을 통해 사유한다는 것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되새겨보게 된다. 한국일보 문예공모전에 더 새로운 이야기와 독특한 생각을 담은 응모작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수상자에게 큰 축하를 보낸다.
윤성희 소설가작년 예심평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질문으로 전환하지 않은 과거를 다룬 소설들이 많아 아쉬웠다고. 올해도 그 말을 다시 반복해야 할 것 같다. 서사란 어떤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의 변화에 따라 서술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가 ‘현재’에서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가 과거를 불러와야 한다. 현재의 시간과 현재의 공간이 잘 그려져야 질문이 생긴다. 질문이 나온 후에야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많은 분들이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소설을 보내주셨는데, 회상한다는 것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 소설들이 많았다. 그게 아쉬웠다. 이 인물들이 현재 어디에 사는지, 현재 무엇이 고민인지, 현재 무엇을 원하는지, 그런 것들이 보여지지 않는다. 보여준 후에 들려줄 것! 이 말을 조금만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현재를 다룬 소설에서도 과거를 전달하는 방식이 미흡한 경우가 많았다. 소설 속 인물은 소설 안의 시간과 자신이 통과한 과거의 시간을 동시에 지닌다. 그 두 가지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소설 작법일 것이다. 이런 면을 조금만 더 연마했으면 좋은 작품이 될 것이다. 투고된 글들을 읽으면 재미있는 스토리도 많고 진실된 목소리도 들린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 것인가,를 조금 더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소설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소설을 쓰고 신문사에 투고를 하는 그 간절한 마음이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 내년에도 다시,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기를. 투고한 모든 분들에게 건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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