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이민을 와 시민이 된 후 미국시민의 기본이라는 생각에서 미국 국가(國歌)인 ‘The Star-Spangled Banner(별이 반짝이는 깃발)’부터 먼저 배우기 시작했다.
중년이 넘은 나이에 서툰 영어를 굳어진 혀로 굴려가며 악보를 보며 익히기가 쉽지 않았다. 음악적 재능이 있는 남편은 멜로디에 가사 맞추기를 먼저 터득하고 한동안 헤매고 있는 나의 틀린 부분을 잘 지도해 주었다. 어느덧 자신 있게 부르게 되자 한가한 시간이면 둘이서 마주보며 합창을 하고 서로 잘 부른다며 칭찬까지 했다.
그러던 2007년 겨울 며칠 감기몸살을 앓고 난 남편이 갑자기 깊은 바다 속에 잠긴 것 같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청신경이 마비되고 알츠하이머가 시작된 것이다. 한 번 막힌 청신경은 끝내 열리지 않았고, 백약이 무효였다. 그동안 열심히 일하며 잘 살아왔는데, 세월 앞에 무너지는 남편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노래를 잘 불렀고 어느 모임에서나 한 번씩 솜씨를 보이고 나면 많은 이들의 갈채를 받았다.
귀머거리가 되고 나서 부르는 노래는 기가 막혔다. 음정과 박자, 목소리가 엉망이었다. 자기 소리를 듣지 못하고 기억만 가지고 부르는 노래는 장님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미국 국가는 1814년에 프랜시스 스캇 키 변호사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항 매킨리 요새에서 영국군의 포탄 속에서도 꿋꿋하게 펄럭이고 있는 미국 국기를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바라보며 감격해서 써내려 간 노래라 한다.
‘O say can you see by the dawns early light’로 시작되는 이 노래를 나는 지금도 남편 앞에서 자주 부른다. 가사는 ‘동이 트는 오늘 새벽에도 어젯밤 우리가 석양 빛 속에도 가슴깊이 환호하고 있던 깃발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본다. 그 누구의 광활한 띠이며 빛나는 별들이기에 우리를 감싸는 성조기는 치열한 전투 중 우리가 사수한 성벽 위에서도 의연히 나부끼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며 작렬하는 포화와 치열한 폭탄 속에서도 우리의 성조기가 우뚝 서 있음을 우리는 보았다. 오! 자유의 땅, 용감한 백성의 땅 위에 성조기는 지금도 휘날리고 있다’는 내용은 왠지 전쟁터 같은 이국땅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우리 이민자들의 삶과도 통하는 것 같다.
약간 허스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남편이 좋아하고 함께 부르던 미국 국가. 사람은 누구나 노인이 되고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의 길은 외롭다. 지금은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고독함과 점점 사라져가는 기억을 안고 죽음 앞에서 꿋꿋이 버티고 있는 그 앞에서 가끔씩 이 노래를 부른다. 남편과의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산 그에게 고맙다는 표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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