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겪게 된 고국의 여름은 가뜩이나 시차에 적응 못하는 심신을 더욱 지치게 했다. 금의환향도 아니니 조용히 일만 마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어찌 알았는지 고등학교 친구놈이 집으로 전화를 해왔다. 어떻게 그렇게 됐다, 다음에 여유 잡고 올게… 내일 출국이라니 더더욱 섭섭해 하는 놈을 잘 달래서 끊었다. 동네 상가에 나가서 필요한 물건을 마저 사고 돌아오니 그동안 전화가 몇 차례 더 왔단다.
열한시가 다 되어 다시 벨이 울렸다. 도저히 그렇게는 안 되겠어서 급히 번개 쳐서 애들 속속 모이는 중이라며 호통이다. 광화문에서 종로 쪽으로 쫌만 들어가면 있다,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하는 친구의 혀가 살짝 꼬여있어 더이상 튕겼다가는 모처럼 육두문자 걸죽하게 뒤집어 쓰겠다. 그래 갈게.
밤거리의 취객들 속에 섞여 신설동 로터리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지나가는 택시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댔다. 몇 년의 타국 생활 탓인지 민첩했던 옛날 뺀질이는 어디 가고 둔해터진 동포는 번번이 순서를 빼앗겼다. 벌겋게 휘청거리는 인간들이 택시 멈추는 타이밍 맞춰 뛰기는 세렝게티의 치타더냐.
이래서야 택시는 포기하고 학창시절처럼 걸어가야 하나 살짝 짜증이 나려는 차에 택시 한 대가 스르륵 내 앞에 섰다. 그것도 빈 택시가. 앞자리 창문이 열리고 기사가 물어왔다. 어디 가시죠? 엇, 귀에 익은 목소리…. 아직도 꺼지지 않은 도시의 불빛에 언뜻 비치는 기사의 얼굴 윤곽이 눈에 익었다. 아 아 더듬던 내 입에서 감탄사처럼 튀어나간 소리, 종로1가!!!
영낙 없는 종일이었다. 칠판보다 창밖 쳐다보기를 좋아하던 아이. 늘 느긋했던 아이. 너 어제 하루종일 뭐했냐? 학교에서 종일 자고 집에 가면 또 자냐? 한창 까불어대던 우리가 이름을 가지고 시도때도 없이 장난을 쳐도 씩 웃을 뿐 화 한 번 안 내던 친구. 너네 집 종로일가지? 그것도 이름놀이에 하나였는데 하필 종일이는 생각나지 않고 별명부터 떠올랐는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타세요라는 건가 뭔가 한 마디 중얼거리더니 종일이는 고개를 돌렸다. 날 아직 못 알아봤나 하하 짜식…. 이게 무슨 인연이냐 반가움에 조수석 문을 당겨 열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 어라?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 매가리 없이 들렸다 놓아지는 빈 동작의 손잡이와 당황스러운 실랑이를 벌이는데 어라? 그냥 택시가 떠나버렸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혹시나 택시 운전하는 모습 보이는 게 창피했나…. 짜식, 난 더 험한 일도 하고 살았는데…. 종일이가 아니었나?…. 긴가민가 섭섭함, 괘씸함, 한쪽 구석이 시린 동병상련이 교차하며 가까스로 택시 잡아 합승해서 광화문까지 가는 내내 종일이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기다리던 놈들과 제법 뜨거운 환영과 포옹, 악수를 나누고 덕담이 쏟아졌다. 넌 어쩜 그때 모습 그대로냐, 너 없는 사이에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네 자리 차지했다... 넌 그래 뭐하냐. 자리에 모인 애들과의 신상 따라잡기에 이어 다른 애들 현황파악이 이어졌다. 당연히 내 질문은 방금 봤던 종일이.
야, 나 여기 오느라 종일이 택시 탔다, 아니 탈 뻔 했는데 그런데 자식이 날 모른 체 하더라.
순간의 침묵과 굳은 표정들 끝에 자리 만든 친구가 운을 뗐다. 어두워서 잘못 봤겠지. 다들 한마디씩 얹었다.
걔 세상 뜬 게 언젠데 넌 몰랐구나. 종일이 그렇게 보내고 종일이 어머니도 넋이 나갔나봐 얼마 전 전화드렸더니 영 엉뚱한 소리만 하시더라.어디가 아팠어 아니면 사고?
걔가 직장에서 명퇴 당하고 택시 몰았잖아. 열심히 살았지. 맨날 밤늦도록 뛰다가 합승 가장한 강도놈들한테 당했지 않냐. 뉴스에서도 났었어. 그런데 너 걔가 택시 몬 건 어떻게 들었냐..
멍해진 내 머리 속엔 종일이가 몰던 택시가 어른거렸다. 빈차 표시등이 꺼져있던.
<
정재욱>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