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기아, 질병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다. 20세기 들어서 만도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최대 4,000만 명이 사망했고 제2차 대전으로 6,000만 명이 죽었다. 1950년대 중국에서 모택동이 일으킨 대약진 운동으로 인한 경제 파탄으로 역시 4,000만 명이 죽었다.
다행히 전쟁으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제2차 대전이 마지막이다. 끝난 지 3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미국에 상처를 남기고 있는 월남전 미군 사망자는 5만, 부시 대통령을 괴롭히고 있는 이라크 전은 3,000이다.
인류의 오랜 숙제인 기아와 질병도 해결돼 가는 중이다. 이제 선진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굶어죽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비만이 국가적인 골칫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북한과 아프리카 등 일부 지역 주민들이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정책의 결과일 뿐 지도자의 결단으로 얼마든지 바로 잡을 수 있는 문제다.
지난 100년간 선진국에서 밀가루와 베이컨 같은 생필품 가격은 수입과 대비해 82~92%나 떨어졌다. 지금 개발도상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언젠가 인류의 보릿고개는 지금 한국에서처럼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을지 모른다.
맬더스의 예상과 달리 이처럼 인류가 기아에서 거의 해방된 것은 기술 혁신과 이를 가능케 한 자유 시장 원리 덕분이다. 미국과 캐나다 같은 광대한 농토를 기계로 경작해 제품 원가를 줄이고 신품종을 개발해 수익성을 높임으로써 아무도 배고플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질병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인류가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은 사실이다. 18세기 중반산업혁명 이전 영국인의 평균 수명은 22세였다. 그러던 것이 1800년 들어서는 36세로, 1950년대에는 69세로 지금은 78세로 늘어난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이처럼 늘어난 것은 물론 잘 먹어 건강해진 탓도 있지만 의학의 비약적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흥미로운 것은 생필품 값은 점점 싸지고 있는데 의료비만은 가속적으로 비싸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서방 여러 나라에서 의료 서비스는 정부가 가장 많이 관여하는 분야다. 다시 말해 시장의 기능이 제일 작동하지 않는 곳인 셈이다. 미국은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를 통해 고령자와 극빈자만 정부가 커버하지만 캐나다와 서유럽 각국은 전 국민 의료를 국가가 책임지고 있다. 국민은 국민대로 의료비를 따져 값싸고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를 찾아갈 필요가 없고 병원은 병원대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부담은 정부의 몫이기 때문이다.
의료 시장의 기능이 그나마 남아 있는 미국에서도 모든 의료비의 85%를 제3자가 부담한다. 개개인이 의료비를 아낄 인센티브가 전혀 없다. 보험이 허락하는 한 의사는 의사대로 환자는 환자대로 가장 비싼 수술과 치료법을 택하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 미국의 의료비 지출 총액은 30년 전 GDP의 8%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16%에 이르고 있다. 노약자 20%가 의료비의 80%를 지출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베이비부머가 은퇴하고 인구의 고령화가 계속되면 이 숫자가 얼마나 늘어날 지 아무도 모른다.
부시가 국정 연설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의료 개혁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다. 상품의 가격을 낮추면서 질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은 시장 원리를 도입하는 것이다. 소비자에게 병원과 의사 선택권을 주고 그로 인해 절감된 의료비 혜택이 본인에게 돌아가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미국도 심각하지만 정부가 전 국민에 대한 의료 서비스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 신생아는 계속 줄어드는 서유럽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미국의 지도자들이 현 국민과 차세대를 위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바란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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