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 데이케어센터서 ‘희망’ 찾은 영화배우 한지일씨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강수연의 첫 남편 역, <아다다>에서 신혜수의 남편 역, 그리고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 중년의 영화 팬들에 익숙한 80년대의 히트 스크린마다 그가 있었다. 한지일(사진). 70년대 말, 불후의 신성일이 사라진 한국 영화사의 남우(男優) 공백을 메운 은막의 스타. 그러나 그 불멸의 이름보다 <젖소부인> 제작자로 더 유명해졌다 세월의 쓸쓸한 커튼 뒤로 사라졌던 그가 워싱턴에서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다. 행복감에 젖은, 그러나 이별을 준비하는 눈물이다.
노인들 수발 8개월
삶의 참 의미 깨달아
“그동안 메릴랜드의 한 데이케어 센터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 모시고 돌보는 일 하며 지냈어요. 하루에 8-9시간 몸이 부자유스런 어르신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힘들었지만 삶의 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한씨가 미국에 건너온 건 2년여 전. LA를 거쳐 메릴랜드로 온 한씨는 모 데이케어 센터에서 8개월간 노인들의 식사 수발과 운전을 하며 보냈다 한다.
그에게 지금 가진 건 700달러짜리 중고차와 월 400달러의 지하 단칸방 하나.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현재다.
홍콩스타 이소룡의 이름을 딴 ‘한소룡’이란 예명으로 영화배우가 된 그는 1978년 이두용 감독의 ‘경찰관’으로 대종상 신인상을 받으며 삶의 색채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이듬해 <물돌이동>으로 아시아영화제 최우수 남우상, 19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누구도 부럽지 않을 청년기를 보냈다.
90년대는 잘나가던 사업가였다. 에로영화 제작자로 변신한 그는 <젖소부인 바람났네> <정사수표> 등의 작품을 대박 내며 큰돈을 벌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IMF를 만나며 100억대의 재산을, 행복했던 가정은 한순간의 외도로, 모든 것을 잃었다.
재산보다 더 큰 상실감은 여성단체로부터 모 소설가와 함께 ‘공공의 적’으로 선정되는 불명예와 사회의 지탄이었다.
“너는 벌거벗은 영화나 찍는 놈이다. 그런 손가락질을 많이 받았어요. 대중 앞에 나서기가 싫고 무서워 숨어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떳떳이 못 만나고 우울증에다 어둠 속에서 살아왔어요.”
그 상처가 죽음이란 유혹으로 이끌었다. 약도 먹어봤고 한 때는 달리는 자동차에 몸을 던지고픈 충동도 느꼈다. 그래서 요즘 톱스타들의 자살을 지켜보는 마음이 예사롭지 않다.
“SBS 드라마를 함께 찍으며 안 정다빈이란 친구는 너무 명랑하고 쾌활해 그 죽음이 믿겨지지 않았어요. 팬들로부터 너무 사랑받고 매스컴의 총아가 된 연예인들이 잊혀지고 인기가 떨어지며 겪는 마음은 누구도 짐작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자신감을 잃고 의지가 약해지면 무너지고 맙니다. 제가 인터넷만 할 줄 알았어도 후배들에 ‘나처럼 한번 살아보라’고 충고해줬을 겁니다.”
그가 미국으로 온 것도 그 이름과 욕망의 헛된 미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그는 노인들에 대한 봉사라는, 땀 흘리는 삶을 이국땅에서 택했다.
사실 봉사하는 삶은 영화배우로 이름을 날릴 때도 그의 단골 메뉴였다. 한지일 부부는 명절 때가 되면 선물을 차에 가득 싣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찾아다녔다.
“그 때는 솔직히 제 이름을 ‘관리’하기 위한 봉사였어요. 돈이 없는 지금은 비록 몸으로 때우며 어르신들을 돌보지만 전 너무 행복해요. 마음에서 우러나는 봉사란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닫고 있습니다.”
한지일씨는 다음 주 워싱턴을 떠나 시카고로 간다. 가끔씩 흔들리는 마음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정처 없이 떠돌 생각이다. 물론 새로운 땅에서도 마트에서 일하며 시간이 나는 대로 양로원을 찾아 노인들을 봉사한다는 마음을 다잡고 있다.
올해로 예순 셋. 해맑고 준수했던 청년의 얼굴에도 작은 잔주름이 패였지만 그는 새로운 인생을 찾은 젊은이처럼 요즘 행복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저는 지금 어르신들 때문에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간다고 하니까 어떤 할머니가 그래요. ‘이봐 가지마’ 그 한마디에 눈물이 막 솟아나요. 짧았지만 정들어서 헤어지려니 힘들어요. 전 지금 너무 행복하답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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