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공중전화
지난 주 LA에 귀향해 휴가를 즐기던 중 한인타운 인근의 카운티 미술박물관을 가족과 함께 관람했다. 지난 십수년 동안 한국관이 몰라보게 확장돼 있었다. 도자기 사금파리 모음부터 이조백자와 나전칠기 공예품, 신정왕후의 경복궁 환갑연을 ‘3D’식으로 그린 8폭짜리 병풍, 대원군의 난초 묵화에다 각종 민속화 및 탱화에 이르기까지 볼거리가 꽤 많았다.
흐뭇한 마음으로 박물관을 나오는데 입구 근처 모퉁이에 낯익은 ‘전시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 봐요…벌써 박물관 신세를 지고 있네요!”라는 아내 말에 웃음이 터졌다. 건물 벽에 부착된 공중전화였다. 가까이 가보니 박물관의 진짜 전시물처럼 관리가 잘돼 있었다. 부스도 깨끗했다. ‘콜렉트 콜’(수신자 비용부담) 안내 설명문이 크게 쓰여 있었다.
지난 노동절 공휴일에 노스 캐스케이드 국립공원으로 산행 갔다가 그곳 수력발전소 방문자센터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한 여행자가 화장실 출입구 벽에 붙은 공중전화로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마 깊은 산 속이어서 셀룰러폰이 안 터졌던 모양이다. 도심 거리에서도 좀체 보기 어려운 공중전화를 심심산골에서 목격한 것이 매우 이채로웠다.
지난 60~70년대 서울 거리에서 빈 공중전화가 눈에 띠면 괜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이 일었었다. 빈 택시가 지나가면 저절로 팔이 올라가기도 했다. 공중전화도, 택시도 재수가 좋아야만 이용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택시는 지금도 호황을 누리지만 공중전화는 2000년 이후 이동통신에 밀려 퇴출됐거나 남아있는 것들도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한국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도 15만대에 육박했던 공중전화는 약 10년후인 지난 7월 7만 8,289대로 반 토막이 났다. 공중전화 총 매출액도 2003년 1,113억원에서 작년엔 145억원으로 8분의1 토막이 났다. 한달 매출액이 1,000원도 안 되는 공중전화가 전국에 5,614대나 되고, 한달간 한사람도 이용하지 않는 공중전화도 114대나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상황도 비슷하다. 공중전화가 해마다 약 10%씩 줄어들고 있다. 현재 미국 전역에 살아남아 있는 공중전화는 42만 5,000여대다. 2000년의 220여만대에서 5분의 1로 줄었다. 대부분 여행자들이 몰리는 공항이나 관광지, 아니면 셀룰러폰 권외지역인 교도소, 무숙자 보호소, 마약중독자 수용소 등에 몰려있고, 통화도 콜렉트 콜이 압도적으로 많다.
영국에선 유서 깊은 빨간 공중전화 박스 60대가 대당 2,000파운드(한화 약 360만원)에 매물로 나왔다. 지난 1936년 조지 5세의 즉위 25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명품 K6’ 공중전화 박스다. 브라질은 반대로 발상의 전환을 꾀했다. 상파울로 도심에 100명의 예술가들이 디자인한 작품수준의 공중전화대를 설치했다. 요즘 이용자들이 다시 늘어나고 있단다.
전혀 새로운 용도로 변신한 공중전화 부스도 있다. 남부 영국의 한 마을 주민들은 폐물 전화박스를 헐값에 구입해 책과 DVD를 갖춘 동네 간이 도서실로 활용하고 있다. 서울 송파구도 이 아이디어를 벤치마킹 했다. 관내 버스 정류장의 공중전화 박스를 재활용해 도서 박스로 꾸미고 주민들과 버스 승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때우도록 배려하고 있다.
뉴욕에선 공중전화가 통신용보다 광고용으로 더 활용된다. 전화회사들이 공중전화 부스를 광고판으로 임대해 연간 6,200만달러를 벌어들인다. 시정부는 지난해 이 수입에서 1,370만달러를 세금으로 챙겼다. 전화세금보다 3배나 많다. 공중전화 박스는 요소요소마다 설치돼 있을뿐더러 임대료도 비교적 저렴해 기업체들이 경쟁적으로 광고를 부착하고 있다.
어쨌거나 공중전화가 박물관에 갈 날은 머지않다. 수많은 전기‧전자 제품들이 그 길을 걸었다. 공중전화를 퇴출시킨 셀폰도 이미 아이팟과 타블렛에 밀려났다. ‘공중전화 세대’인 노인들 눈에는 자꾸만 사라져가는 공중전화 부스가 용도폐기된 자신처럼 보여 비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한국이 정보통신의 최선진국이라는 사실이 이들에게 위안이 될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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