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늦봄 저녁에 덕수궁에서 열린 쌍쌍파티에 간 적이 있다. 장장 16년간 달고 다닌 ‘학동’ 딱지를 떼고 당당한 사회인으로 독립할 시니어들을 축하하는 대학축제였다. 가물가물한 반세기 전 일이지만 확실하게 기억나는 게 있다. 평소 나를 ‘쑥맥’이라고 놀린 친구들을 깜짝 놀래주려고 ‘미녀 애인’을 동반했다. 공개 되지 않은 이종사촌 동생이었다.
말하자면 대학생 프롬파티였는데, 당시 한국에선(지금도 그렇지만) 문화적으로나, 사회경제적 정서로나 미국식 고교생 쌍쌍파티는 상상도 못했었다. 대학생이지만 미국 고교생들처럼 요란하게 차려입지도 않았고, 파트너와 춤추는 순서도 없었다. 주최 측이 준비한 식어빠진 도시락을 먹으며 무명 연예인들이 펼치는 쇼를 구경한 게 그날 행사의 전부였다.
실제로 겪어본 한인부모들은 잘 알겠지만 미국 틴에이저들의 프롬파티는 대단하다.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던 남학생들이 턱시도와 보타이로 정장해 딴 사람이 된다. 특히 여학생들은 모두 결혼식장의 신부나 미스 코리아 대회 후보들 같다. 가슴 패인 화려한 드레스는 기본이다. 짙은 화장에 귀고리, 목걸이 등 액세서리로 꾸미고 성인이 됐음을 과시한다.
프롬(Prom)은 ‘프로메나드’(Promenade)의 준말이다. 정통 무도회장에서 야회복 차림의 남녀가 한쌍씩 줄지어 입장하는 행진을 일컫는다. 미국 고등학교들은 매년 이맘때 체육관이나 호텔을 빌려 졸업파티를 열어주는데, 이곳에 근사하게 차려입은 학생들이 쌍쌍으로 도착하는 모습이 무도회장의 프로메나드를 연상시켜 졸업파티가 ‘프롬파티’로 고착됐다.
그러나 프롬의 원형은 요란한 고교 졸업파티가 아닌 상류사회 처녀들의 성인사교계 ‘데뷔 무도회’였다. 흰 드레스와 흰 장갑으로 치장한 처녀가 아버지의 인도로 무도회장에 입장해 손님들에게 소개된다. 데뷔하는 처녀들이 몇몇 안 되고 무도회 초청자들도 가까운 친지들로만 제한된다. 처녀들은 이날부터 성인 사교계에서 데이트 상대자로 대우 받는다.
한 세기 이상 이어져오는 프롬파티도 초기엔 데뷔 무도회를 본 딴 ‘미풍양속’이었다. 여학생들의 생애 첫 야회복 행사였고, 남학생들도 귀 빠진 후 처음으로 밤중에 아버지 차를 몰고 나가는 날이었다. 물론 야간무도회 자체가 첫 경험이었다. 파티가 끝난 뒤 남자가 꼭 데이트 상대를 집에 데려다 주고 11시까지 귀가해야 하는 등 프롬 규율이 엄격했다.
요즘 프롬파티는 ‘개판’이다. 프롬 자체보다 그 뒤의 ‘2차’에 더 열중하는 아이들이 늘어난다. 몇 쌍이 함께 호텔방을 빌려 밤을 새운다. 끽연, 음주는 물론 마리화나도 피운다. 만취해 집단섹스를 벌이고는 족보미상의 ‘프롬 베이비’를 잉태시키기 일쑤다. 그래서 프롬파티를 앞두고 학생들에게 미리 콘돔을 나눠주는 학교들이 엄청 많다. 참 웃기는 나라다.
학생들만 탓할 게 아니다. 호텔비를 아낀다며 자녀들의 광란파티를 위해 하룻밤 집을 비워준 부모도 있고, 미성년자 아들 대신 술을 사다줬다가 체포된 정신 나간 부모도 여럿 있다. 특히 올해 프롬파티에는 동성 파트너를 동반하는 게이나 레즈비언 학생들이 크게 늘었다. 최근 동성결혼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오바마 대통령의 ‘대 결단’에 고무된 탓이다.
상류사회 풍속으로의 복고현상인지 요즘 프롬파티는 사치가 극에 달했다. 리무진 행차는 옛날 얘기다. 최근엔 헬리콥터를 타고 파티장에 내리는 귀족 학생들도 생겼다. 올해 프롬파티의 1인당 평균비용이 물경 1,078달러로 집계됐다. 웬만한 한인가구는 엄두도 못낸다. 그래서 친구들끼리 싸구려 모텔 방에서 파트너 없이 때우는 한인학생들도 없지 않다.
프롬파티는 이미 지구촌 풍속이 됐다.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네팔 등 동남아 국가에서도 프롬파티가 나름 성행한다. 한국에 프롬파티가 아직 상륙하지 않은 게 신기하다. 발렌타인 데이를 수입해 ‘빼빼로 데이’까지 가지를 치는 나라다. 한국에 분명히 들어갈 프롬파티가 반세기전 내가 경험한 그런 쌍쌍파티 수준이기를 바라는 건 공염불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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