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산 조망대
런던 올림픽 개막식의 깜짝쇼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제임스 본드의 호위를 받으며 올림픽 스타디움 상공에서 파라슈트를 타고 정확하게 낙하해 개막식에 참석했다. 근엄한 여왕이 전혀 섹시하지 않은 ‘본드 걸’로 격하(?)된 이 짤막한 비디오 쇼의 주제는 23번째 007 영화로 내달 영국에서 개봉될 ‘공중추락(Skyfall)’에서 따왔다.
그라운드에 추락하지 않고 사뿐히 내린 엘리자베스 여왕은 사실은 가짜였다. 하지만 여왕호위의 중대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버킹엄 궁전으로 호출돼온 제임스 본드(대니얼 크레이그)를 왕궁 내실에서 맞은 여왕은 대역이 아닌 진짜였다. 본드의 호위를 받으며 왕궁 뜰에서 헬리콥터에 오를 때까지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출연료를 받지 않고 친히 연기했다.
한꺼번에 2편의 007 영화가 개봉된 해가 있었다. 1983년이다. 로저 무어가 주연한 ‘문어 미녀(Octopussy)’와 오리지널 제임스 본드인 션 코너리의 컴백작품인 ‘다시는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Never Say Never Again)’였다. 둘 다 핵탄두 미사일을 둘러싼 액션물로 전자는 날아가는 비행기 위에서, 후자는 수중에서 벌이는 격투장면이 하이라이트였다.
같은 해에 제3의 007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위의 두 영화를 포함해 지금까지 나온 23개의 007 시리즈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007적인 참극이 29년전 오늘 발생했다. 뉴욕에서 알래스카를 거쳐 한국으로 가던 대한항공 007편 여객기가 소련 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포격을 받고 사할린섬 근해에 추락해 탑승자 269명이 몰사했다.
사건 직후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던 소련은 그 후 격추사실을 시인했지만 KAL 007편이 미국의 스파이 비행기라고 억지를 부렸다. 소련의 극동지역 대공 방위태세를 시험하기 위해 미국 첩보당국이 일부러 소련영공에 투입시켰다는 주장이다. 소련은 전부터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가 핵폭탄으로 소련을 선제공격 할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어왔었다.
당시 007편을 격추시킨 장본인인 게나디 오시포비치 소련 공군소령은 처음부터 이 비행기가 민간 여객기인 보잉 747임을 알았었다고 말했다. 동체 양쪽에 창문이 줄지어 있고 두 날개 끝과 동체 밑에 깜빡이등이 작동하고 있었지만 지상 관제탑에는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첩보 비행기를 민간 여객기로 위장하는 건 매우 쉽기 때문"이란다.
앵커리지 공항에서 급유를 받고 떠난 007편이 왜 항로를 이탈해 소련영공 깊숙이 들어갔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숨진 천병인 기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방문 전세기를 조종했던 베테랑이다. 자동항법장치가 오작동 됐을 것이라거나, 승무원들이 조종실에 모여 포커게임을 했다는 루머도 있었고, 미국 첩보당국이 개입됐다는 ‘음모론’도 파다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하고 로렌스 맥도널드 연방 하원의원 등 미국인 탑승객 62명의 목숨을 앗아간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레이건이 소련을 때려잡겠다고 말해주길 기대했었다. 고교 졸업반 반장이자 학교 농구팀 주장이었던 친구가 미국 출장 후 귀국길에 다른 한국인 104명과 함께 희생됐기 때문이다.
그보다 5년 전에도 비슷한 만행을 직접 겪었다. 동서독 분단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총리실 출입기자단이 파리까지 타고 갔던 대한항공 902편이 다음 날인 1978년 4월 21일, 서울로 귀환하다가 북극항로에서 소련 전투기에 의해 무르만스크 인근의 얼어붙은 호수 위에 강제착륙 됐다. 역시 항로이탈로 인한 영공침입이 이유였다. 기자들은 베를린 행을 접고 그 길로 핀란드의 헬싱키에 설치된 사고대책본부로 달려가 이 사건을 취재했다.
친구의 원혼은 지금도 사할린 바다 위를 떠돌지만 KAL 007의 비극이 쉽게 재발할 것 같지는 않다. 조종사들이 항로를 이탈하지도 않을 것이고, 설사 이탈한다 해도 이젠 수교국가가 된 소련이 함부로 격추시키지 못할 터이다. 그보다는 북한의 ‘007 공습’이 더 우려된다. 요즘 미국 주요도시에서 상영중인 한국영화 ‘R2B’의 007식 플로트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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