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박물관 주변에서 T-셔츠와 모자, 기념품 등을 판매하는 벤더상인 이상길 (사진)씨의 하루는 누구보다 활기차다.
“자기 삶은 자기가 행복하도록 만들어 가야 합니다. 사업을 하던 무엇을 하던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임해야 하지요. 그러면 똑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훨씬 편해집니다.”
이 씨의 삶에 대한 이런 생각은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85년 이민 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터득됐다.
올해로 68세를 맞는 이 씨가 주변의 소개로 벤더상을 시작한 것은 1993년. 이민 초기 알렉산드리아에서 3년 여간 편의점 운영을 시작으로 벤더 사업까지 벌인 이 씨는 전혀 생소한 사업들에다 언어 장벽, 문화 차이 등으로 한때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겪었다. 처음 한 5년까지는 힘도 들고, 스트레스도 쌓이고, 자존심 때문에 고객을 상대로 말도 잘 안 나온 적도 있었다고.
“내가 게으름을 피우면 가족이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뛰었습니다. 각양각색의 고객과 씨름하며 꿋꿋이 버텨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벤더상 프로가 다 됐다고 너털웃음을 지을 만큼 여유가 넘친다. 지금은 고객을 보면 어떤 색상이나 디자인을 좋아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해졌을 정도라고 밝히지만 지난 15년간 벤더상을 하며 겪었을 남모를 어려움은 이 씨의 주름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씨가 90년대 벤더협회 회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벤더상이 너무 많아 ‘제 살 깎기’식 과당 경쟁이 점점 심화돼 서로들 몸살을 앓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 씨는 서투른 영어에도 불구하고 시 의원 등 정부 관계자들을 발 벗고 쫓아다니는 열성으로 ‘벤더상 수 제한’이라는 벤더 업체 권익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병환자를 돌보던 경북 왜관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일을 한 이 씨가 함께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데에는 현재의 벤더상을 하면서도 변함이 없다. 외관상 가난해 보이는 고객에게는 물건을 정가보다 싸게 팔거나 그냥 주기도 할 정도다.
벤더업은 성수기인 3월부터 8월말까지는 비교적 수입이 괜찮은 편이나 많은 돈을 버는 사업은 아니다. 그러나 이 씨는 세계 각국의 사람을 만나 볼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직업이라며 벤더상의 고충 보다는 이로 인해 풍성해지는 자신의 삶에 대해 더 관심을 두곤 한다.
매일 새벽 5시경 맨손 체조 운동으로 몸을 가꾸는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벤더 사업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자신의 분신 같은 노상 점포에서 얼굴에 가득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이상길 씨. 그에게 있어 벤더 사업은 이제 참다운 행복을 일구어 가는 터전이 되고 있다. <안성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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