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네 설날이 지나고 우리네 설이 밝았다.
달의 주기를 기준으로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던 선조들은 음력(陰曆) 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시작하며 설을 맞았다.
언제부터 설 명절에 의미를 두기 시작했는지 명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역법(曆法)이 발달하고 시간의 구분에 대한 관념이 자리잡으면서 한 해의 시작을 축하하는 전통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설[元日, 元正 혹은 歲首]은 한식(寒食, 동지에서 105일째 되는 날), 단오(端午, 음력 5월 5일), 추석(秋夕, 음력 8월 15일) 등과 더불어 4대 명절에 속했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설에는 설빔을 차려입고 조상들께 차례를 지낸 후 어른들을 찾아뵈어 세배(歲拜)를 올리고, 떡국과 부침개 같은 세찬(歲饌)을 나눠 먹는 풍속이 있었다.
설과 관련한 흥미로운 풍속 중에는 ‘세화(歲畵)’도 있다. 세화는 질병이나 재난 등의 불행을 사전에 예방하고 한 해 동안 행운이 깃들기는 기원하는 그림이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 따르면 세화는 조선 초기부터 풍습화되어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고 궁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년 세화를 제작했다.
연말 즈음,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했던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들이 세화를 진상하면 왕실에서는 진상된 그림의 우열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궁궐 안팎의 종실과 재상, 근신들에게 하사하였다.
본래 세화를 선물하거나 대문 등에 붙이는 풍습은 왕실과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양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조선 중기 이후 지방관리나 유배를 떠난 신료 등을 통해 전국으로 전파되었고, 민간에게까지 유행하면서 그 수요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새롭게 늘어난 세화에 대한 수요는 지방 관아에 소속된 화원들과 직업 화가들을 통해 충당되었다.
세화에는 전염병을 일으키는 역귀를 쫓는다는 처용(處容)을 비롯하여,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수성노인(壽星老人), 벽사(사악한 귀신을 물리침)의 의미를 지닌 닭과 호랑이 등이 그려졌다. 특히 동물을 소재로 한 세화는 민간에서 유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까치와 호랑이를 함께 그린 작호도(鵲虎圖)가 흥미롭다.
작호도는 본래 중국의 보희도(報喜圖)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희도는 표범과 까치를 함께 그린 그림인데, 표범을 가리키는 중국어 표(豹)와 알린다는 의미의 보(報)가 발음이 같고, 까치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길조이기 때문에 ‘기쁜 소식을 알려주다’라는 의미를 가진 그림이다.
중국의 길상화였던 보희도는 한반도로 전해지면서 신령한 동물로 추앙받던 호랑이가 표범대신 등장하였고, 까치와 호랑이를 소재로 하지만 보희도의 의미는 공유하는 한국식 길상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소나무를 배경으로 하는 작호도는 정월을 상징하는 소나무의 의미를 더하여 나쁜 기운을 막고 새해를 맞는 즐거움을 담아 세화로 널리 제작되었다.
호놀룰루미술관에 소장된 <작호도>는 화면 좌측에 위치한 소나무를 배경으로 두 마리의 까치와 호랑이 한 마리를 묘사했다. 헌데 자세히 보면 백수의 왕으로 사악한 기운을 물리쳐야 하는 호랑이는 어딘지 힘이 빠진 모습이고, 오히려 까치 두 마리는 기세가 등등하여 호랑이를 향해 큰 소리를 내는 형국이다.
힘의 권력이 뒤바뀐 채 주춤하는 호랑이의 두 눈은 촛점이 어긋나면서 주위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흥미로운 작호도의 묘사는 민간을 대상으로 그려진 그림에서 종종 발견되는데, 까치는 일반백성, 호랑이는 힘과 권력을 지닌 지배층을 상징하며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 현실을 풍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음력 설을 맞아 기쁜 소식을 가져다 준는 그림을 보며 힘찬 시작을 준비한다. 답답했던 현실을 그림 속에 빗대어 슬그머니 웃음짓게 만드는 선조들의 여유가 우리 모두의 앞날을 응원한다.
<이미지 정보>
Tiger and Magpies Korea, Joseon dynasty(1392-1910), 19th century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paper
Purchased with funds from the Beatrice Watson Parrent Acquisition Fund, 2001 (9502.1)
작호도
조선시대 19세기
2001년 베아트리스 왓슨 파렌트 수집 기금으로 구입 (9502.1)
오 가 영
호놀룰루미술관 아시아부 한국미술 담당
한국국제교류재단 파견 객원 큐레이터
<고송문화재단 후원>
<
오가영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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